10월의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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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소리

10월의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와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독립운동가 김규식(金奎植, 1882년 1월 15일~1931년 3월 23일)선생을 2011년 10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호는 노은(蘆隱)이며 이명(異名)은 서도(瑞道)이고 별명은 호장군(虎將軍)이다. 1882년 경기도 양주(楊州)군 구리면 사노동 281번지(현 경기도 구리시 사노동 281-14번지)에서 출생하였으며, 아버지는 김영선(金永先)이다.

한말 대한제국군 육군 참위(參尉)로 복무하다 1907년 한일신협약으로 군대가 해산되자 강원도 철원에서 흩어진 군인을 규합하여 의병활동을 펼쳤다.

1908년 1월, 13도 연합의병부대의 일원으로 서울진공작전에 참가, 양주와 철원을 근거지로 일본군과 싸워 큰 전과를 올렸다.

그 후 노령(露領)에서 무기를 구입하려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10년 국권이 피탈되자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1919년 8월 서일(徐一)· 김좌진(金佐鎭) 등과 함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를 조직하여 사단장으로 무장항일투쟁에 앞장섰ek.

또 북로군정서에서 왕청현旺淸縣 십리평(十里坪)에 세운 사관연성소(士官鍊成所) 교관이 되어 김좌진· 이범석(李範奭) 등과 함께 청년교육에 힘썼다.

1920년 10월에는 북로군정서 제2연대 제1대대장으로 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에 참가하여 일본군을 대파 했다.

이어 12월 밀산密山에서 독자적인 활동을 하던 대한독립단(大韓獨立團)· 대한신민회(大韓新民會) 등 여러 독립군 단체를 통합해 결성한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의 총사령관이 되어 3,500여 명의 독립군을 이끌고 러시아령(領) 자유시(自由市)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1921년 6월 자유시사변(自由市事變)으로 무장해제를 당한 뒤 다시 옌지현延吉縣으로 돌아와 상하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노병회의 지원을 받아 망명군을 재편성 했다.

게다가 1923년 5월 고평(高平)·이범석 등과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조직하고 총사령관으로서 영농과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항일투쟁을 계속했다.

또한 1925년에는 김좌진· 김혁(金赫) 등이 북만주 닝안현寧安縣에 조직한 신민부(新民府)에 가담하였고, 1926년 4월에는 지린성吉林省에 결성된 고려혁명당(高麗革命黨)의 중앙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

그 뒤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2세 교육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옌서우현延壽縣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에 힘썼다.

그러나 1931년 4월 10일 학교운영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주허현珠河縣으로 가 최악(崔岳)· 홍진(洪震)· 신숙(申肅) 등을 만난 후 공산주의로 전향한 최악의 사주를 받은 공산당원에게 피살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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