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의 독립운동가 한상렬(韓相烈) 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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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소리

2월의 독립운동가 한상렬(韓相烈) 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의병에서 독립군으로 이어진 무장항일투쟁의 별이셨던 한상렬 선생을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07년 8월 대한제국군이 강제 해산되자 우국지사 한상열은 수수방관할 수 만은 없어 거의토적할 것을 결심하고 동지를 규합해 향리인 횡성에서 의병을 조직했다.

부하 약 이백 명 (세력이 가장 강하였을 때는 1,200명에 이르기도 했다.)을 거느리고 지평·홍천·원주·평창·영월 등지에서 왜적과 교전하기를 무려 5백여 차례에 이르렀다.

1907년 10월에 이르러 전국의 해산병들이 기존의 의진과 합세하여 자못 성세를 이루어 가자 10월 31일에 한갑복·민긍호·이인영·여용서·장모·심상희 등 의병장이 거느리는 의진이 횡성과 지평간에 있는 모고곡 일대에 집합해 8천여 명의 연합 의진이 형성되어 유기적 의병활동을 전개할 수 있었다.

특히 군사경험이 있는 해산병들이 흡수되었으므로 의병활동도 다소 기동성 있게 전개된 점이 이 시기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1908년 2월에 홍천에서 일본의 대부대와 접전을 벌여 격퇴시켰으며 이에 적은 횡성의 일본 수비대를 파견하여 4월 2일 홍주군 월운면 서북후동에 거주하는 한상열의 처자를 납치하여 귀순할 것을 종용하고자 각종의 유인·협박을 가하였으나 끝내 굴하지 않고 오히려 20일에 군사를 거느리고 횡성을 습격하여 적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와 경상북도에 걸쳐 가장 강렬하게 일군과 대항하던 민긍호 의병장이 종말을 고한 1908년 8월을 전후하여 만주로 건너가 1919년 홍범도 휘하의 결사대원 120∼170여명을 인솔하고 연길현 일량구사 일대에서 군수물품 조달 등의 활동을 했다.

1920년에는 왕청현 나자구에서 홍범도, 전이국 등이 조직한 도독부의 경호국원으로 선임되는 등 항일활동을 계속하다가 1926년 9월경 순국한 것으로 추정된다.

< 순천보훈지청 = 허대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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