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의 독립운동가 김붕준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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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소리

4월의 독립운동가 김붕준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독립운동세력의 단결을 주도하였으며, 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한 김붕준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19년 서울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의정원의원·임시국무원비서장 등을 역임했다.

1921년에는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창설하여 활동하였으며 교민단 의사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에는 중국 상해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으로 구성된 대한인교민단의 5대 단장으로 취임했다.

1930년에 상해의 한인학교인 인성학교의 제3대 교장에 피선되어 혁명청소년을 육성하였고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33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광동단장 및 중화민국 국민혁명군학교의 참의로 피임되어 한·중합작으로 항일투쟁을 하던 중 일본군의 진공으로 중경으로 이동했다.

1935년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1940년에는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등 3당을 통합한 뒤 한국독립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하여 집행위원회 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했다.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약을 하던 중 1945년 광복을 맞아 김 구·김규식·이시영 등과 함께 환국하였으며, 건국에 전념하다가 1950년 납북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4월의 독립운동가 김붕준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독립운동세력의 단결을 주도하였으며, 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한 김붕준 선생을 4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19년 서울에서 3·1독립만세 운동을 주도하고 중국 상해로 망명한 뒤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임시정부의 군무부장·의정원의원·임시국무원비서장 등을 역임했다.

1921년에는 흥사단 원동위원부를 창설하여 활동하였으며 교민단 의사원에 선출되었다.

1928년에는 중국 상해에 거주하고 있던 한국인으로 구성된 대한인교민단의 5대 단장으로 취임했다.

1930년에 상해의 한인학교인 인성학교의 제3대 교장에 피선되어 혁명청소년을 육성하였고 한국독립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1933년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광동단장 및 중화민국 국민혁명군학교의 참의로 피임되어 한·중합작으로 항일투쟁을 하던 중 일본군의 진공으로 중경으로 이동했다.

1935년 한국국민당을 창당하고 임시정부를 지원했다.

1939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의정원 의장에 선출되어 활동하였고, 1940년에는 한국국민당·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 등 3당을 통합한 뒤 한국독립당이라는 신당을 창당하여 집행위원회 위원에 피선되어 활동했다.

1943년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위원에 임명되었다.

이렇게 조국광복을 위하여 활약을 하던 중 1945년 광복을 맞아 김 구·김규식·이시영 등과 함께 환국하였으며, 건국에 전념하다가 1950년 납북되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89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 순천보훈지청 = 허대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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