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독립운동가 차경신(車敬信)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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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소리

5월의 독립운동가 차경신(車敬信)선생

국가보훈처는 광복회, 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태평양을 넘나들며 독립운동을 지원한 여성 독립운동가인 차경신 선생을 5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1919년 2월 일본 횡빈(橫濱)여자신학교 재학 중 2·8독립선언 후 김마리아와 같이 비밀리에 입국하여 대구에서 부인회를 조직한 뒤 평북 선천에서 신한청년당의 이름으로 50여명의 회원을 모집하고 3월 1일에 독립선언을 행했다.

이에 체포령이 내리자 피난 겸 벽촌으로 밀행하여 간호대와 청년단을 조직하고 반년간 활동하다가 안동으로 향하던 중 일경에게 피체되었다가 석방되었다.

1919년 11월경 대한청년단연합회의 총무겸 재무로 국내외에서 군자금을 모집하였고, 12월 삼도여자총회를 열어 결속을 다졌다.

1920년 3월 1일에는 평북 선천 보성여학교와 신성학교 학생들이 주도한 독립만세 시위운동에 참여하고, 1920년 8월 하순, 상해 임시정부로 건너가 도산 안창호를 도와 국내를 오가면서 비밀요원으로 활약했다.

1921년 1월, 대한국민회 부인향촌회와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금하였으며, 동년 9월 정애경 등과 여자연합단의 대표로 임정에 자금을 지원하였고, 10월 26일에는 평남 평양부 김상만이 모금한 4백여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 등을 담당하다가 1921년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 상해 홍십자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1924년 1월 미국으로 건너간 그는 초대 애국부인회 회장과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 독립운동을 계속하였고, 로스앤젤레스에 한국어 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으로 교포 자녀들의 교육에 진력했다.

1931년 로스앤젤레스 한국어 학교 교장직을 사면하고 1932년부터 1939년까지 애국부인회 총단장에 재임하면서 각지에 지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하였다. 1924년 미국으로 건너간 뒤 조국광복의 날까지 독립운동을 위한 군자금 조달과 여성교육에 큰 몫을 담당했던 그는 1978년 9월 28일 로스앤젤레스 작은 마을에서 사망했다.

정부에서는 선생의 공로를 기려 1993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 순천보훈지청 = 허대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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